http://hankookilbo.com/v/dc305124b27e4b5aa8f95cd69605c0f2
해방적 파국(Emancipatory Catastrophism): 그것은 기후변화 및 위험사회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 독일 뮌헨대 교수, 코스모폴리탄 연구소장 Ulrich Beck -
기후 변화는 전세계의 사람들 및 정부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이지만, 그것은 전세계의 사회 및 정치 질서를 변경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나의 대답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예상하고 상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형태일 것이다. 변화의 규모는 우리의 상상을 벗어나 있다.
우리들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정 반대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기후 변화의 시대에서, 근대화는 진보에 관한 것도 아니며, 대재앙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잘못된 대안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간(in-between)”에 관한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에 대한 단어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우리들은 일반적이며 과학적인 새로운 어휘를 필요로 한다. 나는 (전세계의 탈바꿈 또는 획기적인 변혁인) “탈바꿈(Verwandlung)”의 개념을 제안한다.
현재까지의 기후 변화에 관한 모든 논의는 그것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지의 여부와 우리가 그것을 중지시키거나 또는 포함시키거나 또는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것이 시간에 매우 민감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던 사실은 해결책에만 집중하였던 우리들의 방식이 우리들로 하여금 기후 변화가 이미 세상을, 세상에서 존재하는 우리들의 방법을, 세상에 관한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그리고 우리들의 상상 및 정치 행위 방법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변화에 관한 이러한 조건들 및 인식의 변화를 나는 탈바꿈(Verwandlung)이라고 정의한다. 개념적 세부 사항 및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이것을 통해서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몇 가지 사례가 있다.1)
첫 번째로, 기후 변화는 해수면 상승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적 계층과 불평등의 근본적인 지형변경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는 세상의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데 그 주요 경계선은 민족국가와 사회적 계층 사이의 전통적인 경계가 아니라 오히려 전 세계를 개념화하는 다른 방식 그리고“삶”의 기회 그 안에서 생존의 가능성이다.
두 번째로, 우리의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받는 그러한 사람들을 포함시키는 경우에만, 우리들은 기후 변화의 결과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우리들이 오늘 현재 그것을 이미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구 온난화는 중요한 정치적 패러다임의 변화로 이어진다.
세 번째로, 정치 및 사회과학 분야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관점에 기후 변화가 어떻게 들어 맞는지 들여다보면, 우리들은 우리들이 “방법론적 민족주의”라고 부르고 있는 것의 한계를 알 수 있다. 각각의 문제가 계층 또는 정치에 관련되어 있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들은 대부분의 모든 문제들을 국제 사회 내에 구성되어 있는 국가의 맥락에서 규정한다. 그러나, 기후변화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이것은 전혀 적합하지 않다.
네 번째로, 글로벌 위험 (이 경우에는 글로벌 기후 위험인데) 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을 우리들이 받아들이는 경우, 우리들은 이러한 개념의 논리 안에 이미 새로운 권력 구조가 내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위험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는 경우, 우리들은 가장 먼저 그것을 의사 결정 및 의사 결정자들과 관련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위험을 떠안게 되는 사람들과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사람들 사이를 기본적으로 구분하여야 한다. 기후 변화의 경우, 이러한 그룹의 사람들은 완전히 다르며, 그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다.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들은 위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관점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지지 않으며,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어떠한 구체적인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조직화된 무책임(organized irresponsibility)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의사결정 과정과 결과는 완전히 서로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게 귀속되므로, 우리들은 처음부터 제국주의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들이 민족국가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문제에 관한 다른 관점을 취하는 경우에만 우리들은 이것을 관찰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코스모폴리탄 관점”(cosmopolitan perspective)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연구 단위는 위험 공동체로서 국가적인 관점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을 포함한다. 즉 그것은 의사결정자들 그리고 그들의 의사결정이 공간과 시간 전체에 걸쳐 다른 사람들에 미치는 결과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탈바꿈(Verwandlung)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탈바꿈은 사회적 변화, 진화, 개선, 개혁, 개혁, 위기, 전쟁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의 방법을 바꾸는 방법이다. 그것은 부작용의 시대를 의미한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방법, 세상에 관한 사고방식, 그리고 상상 및 정치행위의 방법에 도전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방법론적 민족주의’에서 ‘방법론적 코스모폴리탄주의(methodological cosmopolitanism)’로의 과학적 개혁 (Thomas Kuhn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바와 같이)을 요구한다. 여기에 4가지의 주제가 있다.
첫 번째 주제: 글로벌 위험에 숨어 있는 해방적 부작용(Hidden Emancipatory Side Effects)이 있다.
두 번째 주제: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관한 사례 연구는 글로벌 정의(Justice)의 규범적 지평이 어떻게 지구화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세 번째 주제: 글로벌 위험은 21세기 세상에 대한 나침반을 제공한다.
네 번째 주제: 글로벌 위험은 세대의 범주적 탈바꿈을 강제한다.
1. 글로벌 위험에 숨어 있는 해방적 부작용
이 강의에서 나는 글로벌 위험에 숨어 있는 해방적 부작용이라는 탈바꿈의 한 중심적인 방법 또는 변화의 모양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글로벌 위험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공동 생산 및 공동 배분에 관한 것이다. [한상진과 심영희 2010: 동아시아를 위한 제2 근대화의 재정의 특집:British Journal of Sociology 61(3): 465-488; 한상진 2014: 동아시아에서의 제2 근대적 변혁:Ulrich Beck과의 적극적 대화, “Socio” 저널에 출간 예정인 논문 참조]. 이 강의에서, 나는 중요한 한 걸음을 더 나아가고자 한다. 나는 나쁜 것에 관한 논의가 “공통의 좋은 것”을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그와 같이, 이 주장은 지금까지의 세계 위험 사회 이론의 핵심에 있던 것 이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좋은 것의 부정적인 부작용이 아니라 나쁜 것의 긍정적인 부작용에 관한 것이다. 그것들은 공통의 좋은 것의 규범적 지평을 만들고 있다.
인류에게 미치는 글로벌 기후 위험의 영향력 기대치는, (적절한 정치적 해법 및 조치가 실패하리라는 모든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 좋다는 포스트모던적 관점에 대해서, 새로운--유토피아적이 아니라면 반유토피아적인-- 의미를 이미 부여하였다. 기후변화 또는 금융 위기와 같은 글로벌 위험들은 21세기의 세상에 대한 새로운 방향 또는 새로운 나침반을 우리들에게 제공하였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부작용으로 치부하였던 위험들에 중심적인 중요성을 부여하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기후 변화는 단지 기후 변화만이 아니며, 그것은 동시에 더욱 중요하고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고방식, 생활방식 및 소비자의 소비 습관, 법률, 경제, 과학 및 정치의 개혁이다. 기후 변화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능의 개혁으로, 기후 정의(Justice)(부당성-Injustice)의 문제로, 미래 세대의 권리에 관한 것으로 또는 국제 정치 및 국제 무역의 사안으로, 또는 심지어는 자멸적인 자본주의의 지표로 표현하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의도하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글로벌 위험의 해방적 부작용의 극적인 위력에 관한 것이며, 이것은 세상에서의 우리들의 존재, 세계의 전망 그리고 상상 및 정치 행위를 이미 바꿔놓았다.
글로벌 기후 위험은 근대화의 재탄생을 예고할 수 있다. 기후 과학자들은 자멸적이며 자연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의 개혁, 시기가 한참 늦었지만 이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개혁을 준비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중국이 무역에서 재생 가능한 에너지 자원 거래의 급격한 증가를 장려하고 있는 민첩성은 오늘날 이미 반대자들과의 공진화(Co-Evolution)의 사례가 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미국, 유럽 및 아시아에서의 서구 기후 회의론자들은 그들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고 있다.
아마도, 모든 핵발전소들이 일본보다 안전한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핵발전소들을 가동 중단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즉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용된 연료봉의 최종 폐기 문제를 해결해준다. 그리고 이러든 저러든 태양 에너지 및 풍력 에너지의 재개는 의미 있는 근대화의 재개이다.
어쩌면 기후 변화의 상투적인 주제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심지어 동원(Mobilization)의 형태로서 이는 신성한 척 하는 국가적 자폐적 세상을 대재앙이 곧 발생할 것이라는 시각으로 열어젖힌다. 글로벌 기후 위험은 지구 종말적 대재앙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서, 지금까지는 일종의 “해방적 파국(emancipatory catastrophe)”이다.
세계 위험 사회의 해악의 해방적 부작용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의 변화는 3가지의 개념적 렌즈를 통해서 파악되고 분석될 수 있다. 첫 번째로, 세계적인 대재앙의 예상은 인간의 존재 및 문명에 대한 (성문화되지 않은) 신성한 기준을 침범한다. 두 번째로, 그로 인해서 인류학적 충격을 일으키며, 세 번째로 사회적 카타르시스를 일으키고 있다. 이것이 인식 및 행동의 프레임으로서의 새로운 규범적 지평이 등장하는 방법이다.
2. 허리케인 카트리나: 기후 정의(Justice)에 대한 규범적 지평이 어떻게 지구화되고 있는가
인류학적 충격이 발생하는 때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식에 지울 수 없는 표식을 남기는 끔찍한 사건에 처해있다고 느낄 때, 그들의 기억을 영구적으로 만들 때, 취소 불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의 미래를 변경시키게 될 때 등이다. 인류학적 충격은 세상에서 존재하며 세상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가져온 인류학적 충격은 유용한 사례이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숨겨져 있는 해방적 부작용은 허리케인이 2005년 8월 29일에 루이지애나 해안을 강타하였을 때 드러났다. 이것은 그 사건에 관하여 문헌 자료가 어떻게 반영했는지에 명백히 드러난다. 카트리나에 관한 담론의 분석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분명히 보여주며, 실제로, 환경 보호의 과제 및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의 역사라는 이전의 별도의 2개의 담론이 하나로 합쳐지는 사회적 카타르시스를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사례는 “인종의 홍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Quincy Thomas Stewart와 RashawnRay이다. 그들은 “이러한 자연 재해가 식민지 시대 이후 미국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대재앙, 즉 인종의 홍수를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New Orleans(뉴올리언스) 주민들의 삶을 관통한 허리케인 및 뒤이은 홍수와 같이, 인종의 개념은 미국인들의 사회적 제도에 침투하여 인종구분이 개인들의 사회적 상호작용 또는 견해의 폭과 삶의 기회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종은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미국인들이 그들의 사회적 세계를 보고, 경험하며 평가하는 일차적인 렌즈 중 하나이다”. [Quincy Thomas Stewart 및 Rashawn Ray 2007: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인종의 홍수 인종, 성별 및 계층 14 (1-2): 39].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전까지는, 홍수에 대한 불균형 및 난공불락을 기록한 상당한 양의 연구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홍수는 환경 정의(Justice)의 문제로 자리매김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파괴적이지만 매우 불평등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인종적 홍수”라는 대중 및 학계 모두의 성찰을 통해서 강력한 노예제도의 인류세(Anthropocene), 제도화된 인종차별을 되불러 오고, 그것을 취약함 및 홍수와 연결시키게 되었다.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을 연결시키는 이러한 종류의 연결은 해악의 코스모폴리탄 부작용이 실제로 발생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부작용의 불가시성이 가시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미국의 환경 정의 학계 및 활동가들은 그들의 관심을 겉으로 보기에는 “자연적”이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위험으로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연과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 사이의 차이점들을 연결시켜야만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코스모폴리탄적 관점의 사회적 탄생 및 활동이며 정의의 지평이 경험적으로 파악되고 연구될 수 있는 방법이다. “작지만 점점 증가하고 있는 다수의 문헌 자료들이 현재 미국 및 다른 장소에의 홍수의 위험을 환경적 불평등 및 불공정의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 (예, Bullard 및 Wright 2009; Dixon 및 Ramutsindela 2006; Ueland 및 Warf 2006).”[Gordon Walker 및 Kate Burningham 2011: 홍수 위험: 취약성 및 환경적 정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불평등의 증거 및 평가 31(2): 217)].다시 말해 글로벌 정의의 프레임인 새로운 규범적 지평을 등장하게 만든 것 특히 해악의 부작용으로써 공통의 좋은 것을 생산한 것은 사회적 카타르시스이었다. 카트리나는 기후적 재난과 인종적 불평등이 밀접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였다. 이것은 기후 변화와 글로벌 사회 정의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명확하게 만들었다.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일으킨 경험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만드는 성찰의 과정을 만들어낸다. 도시의 홍수를 글로벌 정의의 문제를 가진 인종적 불평등과 연결되어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듯이. 이것은 내가 “사회적 카타르시스” (social catharsis)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카타르시스는 자동적으로 발생하고 사건 자체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오인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목격함에 있어서 활동가들의 “문화적 작업”, “의미작업 (meaning-work)” 그리고 변혁 작업에 성공적으로 참여하는 담지자 집단의 산물이다.
[Fuyuki Kurasawa 2007: 글로벌 정의의 작업 ? 규범으로써의 인권 Cambridge?대학출판부;Fuyuki Kurasawa 2004: 아래로부터의 코스모폴리탄주의: 대안적 세계화 그리고 구속력이 없는 연대의 생성 유럽 사회학 기록보관소 45(2): 233-255].
이러한 의미 작업은 다음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위협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망, 건강, 경제적 파산, 도덕적 황폐함인가? 희생자들은 누구인가? 그것들은 참여하는 대중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하게는, 그것들이 현재 어디에 있든 관계없이, 글로벌 공동체 및 개인들, 공동체 및 기관들은 이에 대응하여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문화적 작업은 단순히 사건들의 표현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는 사건들이 대재앙의상상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그렇게 인식될 수 있는 상징적인 환경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적 사건 및 대중매체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된) 기후 문제에서 또는 기후 미학(climateaesthetics)에서 그리고 (만화, 블록버스터 영화, 공상 과학 영화 등) 대중 문화에서 표현되는 바와 같다, “예술 행위는 이러한 “위험한” 코스모폴리탄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으며, 전개되고 있는 기후 문제 및 우려에 미적 음향과 “가시성”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코스모폴리탄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 [Line Marie Thorsen 2014: 예술 및 기후변화: 미학의 세계화/세계화의 미학? 미발표 논문, KiyomitsuYui 2013: 시각적으로 전달되는 기후변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부터 “이것은 후쿠시마가 아니다”까지, FMSH-Working-Paper-2013-35, 2013년 6월;Chou Kuei Tien 2013: 대만에서의 기후 변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그 패러다임의 이동 에너지 정책 61:1252?1260 참조]
“변혁 작업”의 사례는 Gordon Walker에 의해 환경 정의 프레임이 주제, 배경 및 대륙에 걸쳐 어떻게 확산되고 분산되었는지에 관한 그의 연구에서 제공되었다. [2009: 분포상의 근접성을 넘어: 환경 정의의 다중 공간성 탐구, Antipode 41(4): 614-636]. 정의가 주장되고 있으며 정의담론이 표현되고 있는 공간-문화적 그리고 제도적 맥락은 미국을 벗어나서 지구화가 되고 있으며,예를 들어, 남아프리카 (London 2003), 대만 (Fan 2006), 호주 (Hillman 2006), 영국 (Agyeman및 Evans 2003), 뉴질랜드 (Pearce 등, 2006), 스웨덴 (Chaix 등, 2006), 이스라엘 (Omer 및 Or2005) 그리고 전세계적인 배경을 (Adeola 2000; Newell 2005) 포함하고 있다.
한상진 교수가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동아시아에서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과거극복의정의 또는 어떻게 과거를 다룰 것인가에 관한 질문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일본이 명확한 사례이지만, 문제는 실제로 더 넓고 깊다. 동아시아에서는 인권의 체계적인 침해, 이념적 적대감, 그리고 민족주의에 대한 과도한 몰두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2차 근대화 변혁에 관하여 탐구할 필요가 있는 첫 번째 문제점은 체계적인 폭력의 사용, 제도적인 부와 권력의 추구, 그리고 공격적인 민족주의 동력을 통해서 역사 속에 깊이 뿌리 박힌 근대화의 원초적이며 자멸적인 경향이 통제될 수 있는지의 여부, 그리고 그러한 경우, 보호 장치는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의 여부이다.” [한상진 2014: 동아시아에서의 2차 근대화: Ulrich Beck과의 적극적 대화, “Socio” 저널에 발표될 논문: 7]
3. 21세기를 향한 나침반
Verwandlung 혹은 세계의 탈바꿈은 의도적이며, 목표 지향적이며, (당 또는 국가 사이의) 이념적 투쟁의 일부 및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관한 사례 연구를 통해서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과 같이,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의 마음의 벽의 뒤에서 잠재적으로 진행 중인 가능성이며, 그것은 (국가 및 국제) 법률과 사회과학적 지식 생산에 의해 “자연적으로” 그리고“스스로 입증되는” 것으로 구축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야기의 다른 부분은 대재앙의 인류학적 충격이
“코스모폴리탄 계기”를 생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장경섭 2010: 차 근대의 조건? 내재화된 성찰적 코스모폴리탄화로서의 압축적 근대화 특집: British Journal of Sociology61(3): 444-464 참조] 이러한 카타르시스의 순간에, 제도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부작용의 마음의 벽이 붕괴되고 있으며, 우리들은 코스모폴리탄적 지평이 어떻게 등장하고 지구화되는지 문화적 사실을 경험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나는 철학적 규범적이고 유럽 중심적인 코스모폴리탄주의의 면에서 주장을 펴지 않았다. 나는, 기후 변화가 신성한 것의 윤리적 침해라는 기본적 느낌을 경험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것은 동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미국 등에서의 규범적인 전통에 따라 달라지고, 법률, 기술, 도시의 변화, 국제, 도시간 협상 등 모든 종류의 규범적인 기대 및 발전에 대한 가능성을 창출한다. 이것은 규범적인 기대에 대한 코스모폴리탄적 지평을 향한 탈바꿈(Verwandlung)의 위력이며 직선적인 정치적 해답이 없다. 이것은 (사회 및 정치 지도자 그리고 사회과학적 관찰자들에게) 비판적 관점이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은 명확히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동시에 경험적이며 규범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 관점의 규범성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것은 “가치 관계”의 권력에 관한 것이다 (Max Weber는 그것들을 가치 관계(Wertbeziehungen)라고 불렀다.) 이것들은 가치가 부여된 용어, 문장 및 명시적인 도덕적 언어를 사용하는 가치 판단과 혼동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의 실체는 시간-진단 이론의 프레임에서 관찰자의 관점으로부터 연구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험적이다.
기후 정의에 관한 논의는 수많은 장애물들을, 때로는 이론적으로 문제가 많은 종류의 장애물들을 드러내었다. 하나의 사례는 기후 정의의 문제가 생존하고 있지 않는 제외된 세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들이 가장 많은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제기된다. 아직 생존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의사 결정에 있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혀 낼 수 없는 국민들의 삶의 조건에 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의의 지평을 어떻게 다루고 설명할 것인가? 기후 변화 위험에 의해 불공정하게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종종 특정하여 어느 누구 에게도 불평을 할 수 없다. 그들은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어떠한 조치도 요구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달 보고 짖을”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이것은 기존의 국가 법률 시스템을 적용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고 있으며, 제외된 사람들을 다시 제외시키고 있다.
동시에, 기후 정의에 대한 비전은 조만간 식민지의 역사적 패턴의 지속과 (법적 행위자인) “국민”과 “환경” 모두의 법적 구성과의 조밀한 연결 관계 및 역학 관계를 인정하여야 한다. 기후정의의 문제는 국제법의 식민지적 토대와 서구의 사법적 상상의 철학적 토대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음을 발견한다. 결과는, 경험적으로 그리고 따라서 규범적으로 위태로운 것들은 생존 질서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침해의 방식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들은 “종속 이론”과 “코스모폴리탄화 이론” 사이의 차이점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식민지 역사의 불리한 쪽에 있었으며 고통을 당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그러한 개인, 공동체 및 국가들을 지목함으로써 기후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글로벌 기후 위험에 의해 강제되는 코스모폴리탄화가 정확히 그러한 사실에 관한 규범적 지평 및 성찰을 생성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사실로서), 그 이상으로(경제, 법률 및 정치 등의) 제도의 개혁이 현재 긴급하고, 도덕적으로 필수적이며 정치적으로 가능하다는 기대치 (또는 종종 확신)을 생성한다. 비록 회담 또는 정치에서 실패한다 하더라도, 나는 이러한 비판적 관점의 경험적 세계화에 기반하여 우리들이 기후변화를 기술관료 국가적으로 (그리고 초국적으로) 길들이는 것, “녹색 경제”에 관한 탈 정치적 합의, 기술 혁신 등을 비판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것은 사건들이 정치 경제적인 사안이 되는 경우이며, 본질적으로 기후 변화와 관련되어 있는 코스모폴리탄적 관점에서, 우리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탈 정치적 유럽의 “합의”를 존중하지 않는 새로운 글로벌 지형을 포함하고 동원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국제적인 권력 관계의 탈바꿈의 핵심적인 요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Verwandlung 또는 탈바꿈도 위협적인 미래에 대한 상상을 통해서 과거가 다시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 결정을 인도하였던 규범 및 책무가 다시 평가되고 있으며, 위협적인 미래에 대한 상상을 통해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것으로부터 자본주의, 법률, 소비자 중심주의, (예를 들어, IPCC 등의) 과학 등에 대한 대안적 아이디어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교조주의적인 방식에서 일상의 규범 생성에 대한 자기비판적인 접근도 포함하고 있다. 기술 관료적인 환경 정치의 강철 우리에서 탄소 배출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있다. 수동 칫솔대신에 전동 칫솔은 얼마나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있는가? 기독교의 구원 개념에서는 낙원에 우유와 꿀이 흐르고 있지만, 지상에서 흐르는 우유는 곧장 환경적 사망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기후 살인자” 젖소는 우유 1리터 당 거의 1 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수백 리터의 메탄 가스를 매일 방출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심지어 이혼도 신 앞에서뿐만 아니라 환경 앞에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이유는? 기혼 가구는 독신 가구보다 더욱 환경적으로 건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바라보는 경우, 기후 변화 위험은 이산화탄소 측정치 및 공해 방출 이상의문제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인식의 위기를 경고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글로벌 기후위험은 세상에서 존재하고, 보고, 듣고 활동하는 새로운 방법을 생성하고 있다. 매우 모순되고 상반되며 열려 있으며 예측이 가능한 어떠한 결과도 없을 수 있지만.그 결과, 21세기에 대한 방향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방향은 포스트모던적인 “무엇이든 좋다”와는 다른 것이며, 잘못된 보편주의와도 다르다.
이것은 비판 이론의 새로운 변종으로서 그 자체로는 규범의 지평을 설정하지 않지만 경험적 분석으로부터 기준을 설정한다. 따라서, 그것은 자아비판적인 세계 위험 사회의 규범적 지평에 대한 경험적 분석이다.
4. 세대의 탈바꿈
글로벌 위험 세대가 있는가? 전세계의 탈바꿈은 세대들 사이의 단절에서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가?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상상을 하고 정치행위를 하는 것은 사회적 세대 사이에 서로 다른가? 세상의 탈바꿈은 세대 간의 서로 다른 개념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 현존하는 미래의 글로벌 위험에 직면하여 세대 간에 서로 다른 자아인식이 있는가?
Karl Mannheim (그리고 Pinter)에 의해 개발된 세대 간의 문제점 논의에 근거하여, 나는
Mannheim이 상상하고 있는 동적 역사 사회학이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적 전환이라는 생각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묻는 것이다.
Karl Mannheim은 사회적 계층화(social stratification) 양식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세대에 초점을 맞추고, 계급(class)과 대비되는 세대(generation)를 강조하고 있다. 세대에 대한 그의 인식에 관하여 특징적인 것은, 예를 들어, 그가 “동적 사회학”이라고 부르고 있는 시간의 역사 사회학 내에서 그것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강의에서 내가 개발한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Mannheim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그는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다. 첫 번째로, 우리들은 그가 사회 계층의 탈바꿈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계급 개념을 세대의 개념으로 범주적 탈바꿈하는 데서 이것을 포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그것을 통해서Mannheim은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질서 (계급)의 재생산이론에서 그것(세대)의 변화이론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것은, 경험적 실체에서의 사회적 지식 및 제도뿐만 아니라, 흐름과 동력의 의미에서, 사회학적 개념의 이동을 찾고자 하는 그의 전략에서 명백하다.
Mannheim은 선형과 연대순의 아이디어를 벗어나는 역사적 시간의 사회학을 개발한다. 이러한 사고의 중심에는, “시간 세계(time worlds)”라고 불릴 수 있는 공존의 사상이 있다. 이것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동일한 시점(same time)”에 살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동종의 동시성(homogenous simultaneity)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Karl Mannheim은 ‘Ungleichzeitigkeit des Gleichzeitigen’ (동시적인 것의 비동시적 혼재)이라는 역사학자 Pinter의 아이디어 즉 탈바꿈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있다. Pinter는 예술과 양식의 시대개념을 반대한다. 그는 모든 시점에서 예술의 역사적 시대와 양식은 동시에 그리고 서로 근접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별개의 폐쇄된 역사적 단위로 잘못 인식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Pinter는, 진화 또는 진보의 논리에 따라 하나의 시대가 다른 시대에 의해 교체된다는 시간 및 역사의 아이디어를 반박하고 있다. 예술 역사학자로서, 그는 신낭만주의적인 비전의 탈바꿈을 개발하고 있다. 그는 그에게 있어서는 예술적 창의성에 의해 삶과 죽음이 극복될 수 있는 신화적 아이디어인 “활력(entelechy)”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Mannheim은 Pinter의 사고에서 특정한 요소들을 채택하여, 자신의 사회학적 세대이론을 위해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사용한다. 그는 세대를 구성하는 것은 실증주의적인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의 패턴 또는, 이 강의의 표현으로는, 세상의 탈바꿈의 패턴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Mannheim의 경우에 있어서, 세대의 개념은 변화 및 탈바꿈에 대한 동의어이다. Mannheim의 관점에서는, 세대 간에 상당한 차이와 분열이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월 스트리트 점령 운동(Occupy), 아랍의 봄(Arab Spring), 디지털 세대, 남부 유럽의 실직자 세대 및 “자생적”(home-grown) 근본주의자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서로 다른 지평 및 세계관 사이의 상호작용 및 충돌을 의미하고 있다.
Mannheim은 3가지의 개념들의 도움을 통해서 세대들이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 번째는 “세대 위치(generation location)” 개념이다. 이 개념은, 세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경우에, 사람들은 먼저 세대의 위치를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세대는 용이하게 일반화 될 수 없는 역사적인 시점에서의 실제적인 위치에 대해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개념은 “세대 연합(generation association)”이다. 이 개념은 세대의 구성원들이 그들 자신을 형성하고 그들이 공유 감각을 설명할 수 있는 공동의 운명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 번째 개념은 “현실적인 세대(actual generation)”이다. 이것은 세대의 구성원들이 공동의 문제의식(common sense of problem)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Pinter와 함께 그리고 그와는 다르게, Mannheim이 “활력(entelechy)”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Mannheim은 공동의 문제의식이 공동의 대응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이와 동일하지도 않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정확하게는 서로 다른 세대간의 위치 및 연합 때문이다. 이 개념은 세대의 구성원들이 사회적 행위자들이라는 점을 추가로 의미한다. 그들의 통일성은 그들의 행위로부터 발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대는 정치적이다. 그들의 변화의 원동력은 그들이 저항에 대항하여 공유하고 있는 이상향에 근거하고 있다.
Mannheim의 세대이론에서 매혹적인 점은, 행위에서 자신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가 세대를 이해한다는 점이다. 세대에 대한 그의 생각은 공동의 문제의식이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그는 공동의 역사 합리성을 가정하고 있다. 나의 의견은-코스모폴리탄적 전환에서는, 공동의 문제의식 즉 역사적 합리성은 글로벌 위험에 의해 형성되고 변형되고 있다는 것이다.
Mannheim은 세대에 대한 변화의 원동력으로서의 이상향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차이점은, 글로벌 위험은 인류의 존재에 관한 것이므로, 글로벌 위험은 상당한 동원력을 가지고 있는 반이상향적 시각이라는 점이다. 앞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글로벌 위험은 이념과 정치적 프로그램을 벗어나는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다. 글로벌 위험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한 핵심은 나쁜 것이 공통의 좋은 것의 규범적 지평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이것은 Mannheim이 주장하는 세대분열의 아이디어가 급진화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글로벌 위험은 코스모폴리탄화 (cosmopolitization)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코스모폴리탄화는 세계의 대립과 적대감이 외면화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제도에서부터 개인의 삶까지 모든 사회 및 정치 차원에서 충돌한다. 그와 같이, 세대의 탈바꿈은 이러한 코스모폴리탄화, 즉 이러한 적대감의 충돌이 세대 간의 ‘Sinnhorizont’(의미의 지평)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대의 변화는 단지 정치적 견해, 사회적 불평등의 상황, 충돌 및 위기에서의 차이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상상을 하고 정치행위를 하는 것의 차이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코스모폴리탄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세대를 함께 유지하는 것은 글로벌 위험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성찰 및 반성이다. 이러한 성찰 및 반성은 예를 들어, 인류의 존재위협과 같은 글로벌 위험에 직면하여 Mannheim이 “활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코스모폴리탄적 전환”은 무엇인가? 우리들은 21세기에 대한 사회학을 어떻게 다시 만들 수 있는가? 사회학의 코스모폴리탄적 전환의 중심에는, 즉 글로벌 위험 및 코스모폴리탄 상황이 어떻게 사회학의 기본적 개념에서의 의미의 변화로 들어가는지에 있어서는 ?예를 들어, 계층에서부터 위험 계층, 위험 국가, 위험 지역으로, 국가로부터 코스모폴리탄적 국가로, 세대로부터 글로벌 위험세대로, 파국으로부터 해방적 파국으로, 합리적 자본주의로부터 자멸적 자본주의 등으로-- 세상의 탈바꿈 과정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북반구와 남반구의 패러다임,“서구”와 “나머지 지역”의 신 자유주의적 주장에 더 이상 매몰되어 있지 않고, 알려져 있지 않은 국경관계에서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글로벌 타자들도 동시에 포함하는 탈바꿈 과정이다. 그것들은 새로운 구조적 형태의 코스모폴리탄 연구에서 (진단적, 중간 범위의) 코스모폴리탄적 이론화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 즉 나의 동료들인 Elisabeth Beck-Gernsheim 교수, AndersBlok 교수, Daniel Levy 교수, Dr Sabine Selchow, NatanSznaider 교수, Line Marie Thorsen교수, David Tyfield 교수, Ingrid Volkmer 교수, Dr Mao Zhifei 및 내가 기후 변화에 관한 ERC(유럽연구이사회) 프로젝트 에서 실행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
http://www.hankookilbo.com/v/367b90947bec48ea94e2fbeb2ad1c7f5
위험사회' 울리히 벡 교수가 본 한국사회
‘위험사회’의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코스모폴리탄 연구소장)는 ‘세월호 침몰 참사’가 한국 사회에 던진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까.
벡 교수가 8일 오후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중민재단,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국회기후변화포럼, 기후변화센터가 여는 ‘2014 서울 국제 학술대회’에서 공개 강연에 나섰다. 벡 교수가 들고 나온 주제는 ‘해방적 파국, 기후변화와 위험사회에 던지는 함의’다.
‘해방적 파국’은 벡 교수가 지난해 독일 포츠담 워크숍에서 쓴 개념이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기후 변화를 둘러싼 우울한 종말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우리의 관심을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 전망으로 이끈다”며 “위험사회의 징후들이 너무도 깊게 만연해 삶의 안전과 더불어 일종의 해방을 바라는 대중의 열망이 큰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라고 평가했다.
벡 교수는 21세기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갖는 해방적 파국의 의미와 세월호 침몰 참사라는 전례 없는 비극을 겪는 한국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벡 교수의 강연은 오후 2시 45분부터 시작됐다.
또 그에 앞서 한상진 교수는 ‘울리히 벡 교수의 ‘해방적 파국’ 분석을 한국사회에서 해독하는 방식’이란 주제로 한국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벡 교수의 이론에 대해 강연했다. 한국일보는 온라인을 통해 해당 강연 내용을 상세히 전한다.

울리히 벡 교수. 연합뉴스
[오후 2시 40분부터]
◆해방적 파국: 그것은 기후변화 및 위험사회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ㆍ코스모폴리탄 연구소장
안녕하세요(한국어로, 좌중 웃음)
먼저 환대해주신 데 감사의 말씀드린다. 강의 시작하기 전에 제 강의에 대해 훌륭한 해석 해주신 한상진 교수에게도 감사의 말씀 전한다.
제가 시작하기에 앞서 셰익스피어의 한 말을 인용하려고 한다. ‘시간이 어긋났다’는 말이다. 여러분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이지? 라고 질문하면 가장 평범하고 솔직한 답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일 것이다.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모르겠다.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질문은 ‘어떻게 세계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해할 것인가’이다. 이에 대한 제 답변은 간단하지만 강연 하게 됨에 따라 점점 더 복잡해 질 것이다.
현재 우리는 세상의 변화, 즉 탈바꿈을 경험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이것을 잘 표현할 만한 예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제가 말씀 드린 탈바꿈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에 걸맞은 영어 표현이 없었다. 번역된 한국어 설명 보고서야 영어 표현을 찾았다. 이것이 바로 코스모폴리탄적 접근이 아닐까 한다.
제가 이 탈바꿈과 관련해 말씀 드리고 싶은 측면은 지구 종말론적인 측면이 아니라 인식적인 변화에 따라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탈바꿈 과정과 관련해 한가지 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다. 여러 가지 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 관계 중에서도 기후변화와 위험사회, 그 둘과의 관계에 대해 중점적으로 말씀 드리겠다. ▶
울리히 벡 강연전문 보기

8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위험사회' 저자 울리히 벡 교수가 '해방적 파국, 기후변화와 위험사회에 던지는 함의'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홍인기기자 hongik@hk.co.kr
[오후 3시 52분부터 자유토론]
*플로어 질문에 벡 교수가 답변
사회자: 22명에게 질문 들어왔다. 번역하기까지 시간 오래 걸릴 것이다. 토론 생동감을 통해 일문일답으로 벡 교수 반응 듣도록 하겠다. 그래서 제가 호명하는 분은 가급적 짧게 하나의 요점, 하나의 질문만 해달라. 시작하겠다.
Q. 기후변화라는 지구적 위험 상황에서 해방적 파국이라는 희망적 전망 열어주신 것 굉장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모두가 기후변화를 해방적 파국의 기회로 삼거나 그렇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세대를 굉장히 중요한 문제 해결의 주체로 보고 있는데 해방적 파국으로서 기후변화가 작용하기 위해서는 누가 어떤 식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것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이라고 보시는지 궁금하다.
A. 어려운 질문 감사하다. 여러가지 많은 문제를 맞고 있다. 우선순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관계에 있다. 그중 가장 심각하고, 어두운 위험이 그나마 많은 관심 받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라는 것은 보통 핵 에너지 위험과 많이 비교되기도한다. 기후변화 해결하기 위해서 핵 에너지 이용해야 한다는 이상한 주장이 있는데 그게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후변화 여전히 중요한 사회 문제다. 사회 측면에서 보면 기후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 부작용에 대해서만 역점 두고 있다. 여러 정의들 간의 경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개념의 권력적 구조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도 말하고 싶다.
Q. 역사적 관점에서 이산화탄소 농도가 400ppm 초과한다. 그래서 지구 종말이 다가왔다는 우려한다. 산업혁명 전에도 지구 종말 왔다는 부정적 견해 있었지만 잘못된 주장으로 드러났다. 이런 지구의 기후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나.
A. 저는 파국과 파국에 대한 예상과 기대 그 둘 사이 구분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파국은 이미 발생한 것이고, 다시 말해 그에 대응할 수 없다는 걸 뜻한다. 이 문제는 기후 과학자들에게도 어려운 문제다. 기후과학자들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파국에 대한 기대, 예상이 글로벌 위험에 대한 파국이 발생했을 때 어떤 대응도 할 수 없다고 말씀 드릴 수 있다.

8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위험사회' 저자 울리히 벡 교수의 공개강연에 앞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세월호 침몰 참사와 관련한 세가지 질문 한꺼번에 받고 답변]
Q1. 허리케인 카트리나 얘기가 나오면서 단순히 홍수로 끝나는 게 아니라 미국 사회 고질적인 인종차별 드러내는 결과 가져왔다고 했는데, 세월호 참사도 참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민관 유착, 시이오의 불법행위나 도덕적 해이 등이 드러났다. 이를 바꾸기 위한 탈바꿈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 문제점 바꿀 수 있는 탈바꿈의 동력은 무엇인가.
Q2.해방적 파국 이론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탈바꿈 현상이 기후 위험이 아니라 인위적인 재난 위험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 참사 사건에 견줘서 설명 부탁한다.
Q3.세월호 참사는 조직화된 무책임을 표상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나고 또 그를 수습하면서 정부의 무능, 기업의 탐욕이 드러나고 보도되면서 역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깨달음도 얻게 됐다. 이것이 교수가 말하는 탈바꿈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A. 세가지 질문이 모두 관련성 있다고 보니 한꺼번에 답변하겠다. 세월호 참사는 아주 특별한 재앙이기도 하고 제가 말한 상황과 깊은 관련성 있다. 참사 발생하면서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먼저 국민들이 분노 했고 그 다음에는 소위 정부의 정치학인데, 이좋은 질문에 대해 나쁘게 답변하는 것이다. 자기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다 보니 더 나쁜 결과를 낳게 되고 정부의 무능과 무지를 드러내게 됐다.
그리고 두 번째로 국민들이 분노에 더해 깨닫는다는 거다. 실상에 더해 정치적 결정, 처리 방식, 그 결정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데 대해 국민들이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과거 정치와 제도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제도와 정치인, 정치제도 자체에 대해 회의 갖게 한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회의가 정치와 제도에 위협이 되고 정치와 제도의 정당성 약화하는 결과도 가져온다.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 사태 잊게 되면 조용해지게 되면 정치인은 과거의 관행으로 돌아가 과거 답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위험은 사라진 것이 아니고 정치와 제도의 정당성 약화가 강해지면서 정치 경제 제도에 영향 미치게 될 것이다.
아까 질문 중에 탈바꿈의 동인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자동적으로 발생한다고 보지 않는다. 여러 그룹, 여러 요인에 달려있다.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 또 시민이 이런 사태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이런 사건은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비슷한 사건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한 번 국민들이 분노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과정 반복되면서 탈바꿈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Q.경제학적 관점에서 질문한다. 변화 예측할 수 없는 시대라고 정의했지만 산업계가 기후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A.기본적이고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짧게 답하겠다. 이산화탄소 배출에 대해 계량적으로 측정할 때 기업 차원에서 실시하는 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만 하고 있다. 국가간만 비교를 하지 산업이나 기업 단위로 측정하거나 비교하지는 않는다. 이산화탄소 배출의 책무성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기업이 산업단위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 업계에서는 이런 글로벌 리스크를 기회로 포착해야. 새로운 시장, 기술 창출의 기회로 봐야한다. 산업이나 경제도 배운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기업이 기후변화 자체를 부인할 경우엔 성공의 기회 없다.
Q.동아시아에 대한 교수의 생각이 궁금하다. 어떤 가능성 가졌고 위험 극복에 어떤 강점 있다고 보는가.
A.동아시아 상황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왜 지금까지 아시아연합 구축하고자 하는 현실적 정치적 시도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이 아시아연합 구축 동인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국가가 맞고 있는 공동의 위협이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의 해답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아직 왜 그런 시도가 없었는지 이해되지 않아. 물론 어렵다는 걸 안다. 2차 세계대전 때문에 유럽연합 창출되리라는 것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 아픔 극복하고 만들어졌다. 아시아연합도 이와 다른 형태로 만들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Q.저는 한국의 20대 대학생이다. 한국사회의 현 20대는 위험 사회에 대한 개념도 잡혀있지 않고 대처능력도 부족하다. 이에 앞으로 한국의 20대가 앞으로 위험 사회를 극복할 수 있을지 고견을 듣고 싶다.
A. 20대가 위험사회에 대한 인식이 낮다고 보지 않는다. 비슷한 질문을 여러 대륙 여러 국가의 젊은 세대에게 했다. 두 가지 놀라운 사실 알았다.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여러 젊은 세대에 질문을 했는데, 환경에 대한 인식 가장 높다는 걸 알았다. 독일 젊은 새대들이 생각보다 낮았고 아시아 아프리카가 생각보다 환경에 대한 인식 많았다. 고무적인 건 젊은 세대의 정보행동이다. 현지뉴스에 대해 관심 갖지만 관심 있는 뉴스 3분의 1은 글로벌 문제에 대한 것이다. 세대적 문제에 대해 조사했는데 이것이 바로 젊은 세대에 대해 관심 갖는 이유다. 젊은 세대는 생태 등 글로벌 이슈에 많은 관심 갖고 이것이 종국에는 탈바꿈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Q. 한국에 대한 질문이다. 해방적 파국이라는 설명 구조에 한국사회가 얼만큼 노출 되어 있다고 보는가.
A. 한국적 상황에 대해 자세히 모르지만 답하면 해방적 파국이란 개념이 해결책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문화적 비관주의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기후 변화 과학자에 대해 말하면 이들은 기후 변화에 대해 아주 비관적 태도 갖고 있다. 이들의 비관주의가 어느 정도는 맞다고 생각. 하지만 사회학자는 다른 접근방법 취한다. 기후 변화와 관련해 실태를 보고 해결책 모색하려고 한다. 한국서도 이런 노력과 시도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Q. 나는 바로 그런 비관주의자다. 기후 변화로 탈바꿈 일어나려면 좀더 시간 필요하지 않을까? 인류를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은 현 사회 시스템이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아주 강력한 무기 가졌기 때문인데 중독이라는 이름의 쾌락이다. 저는 기후변화 문제에 직면한 이후 잠을 제대로 못자고 있다. 기후변화라는 이슈에 사람들 눈 끌어오기가 힘이 든다. 기후 변화도 자극으로 받아들여서 자극적 이미지에 충격 받고 분노, 행동하려고 하지만 다른 자극이 주어지면 바로 눈길을 돌린다. 꾸준한 행동 이끌어 내기가 힘이 든다. 교수님은 스마트폰을 밤새 본 적 있는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스마트폰 하나가 재정 러시아의 차르보다 더 많은 유희를 준다. 요즘 세대는 글로벌 이슈나 자극 마저 유희로 받아들이는 듯 하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나.
A. 공감한다. 많은 사람들은 문제를 쉽게 잊는 경향 있다. 기후변화 시간이 중요한 문제다. 비관적 상황 말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제도적 메커니즘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기후변화는 단순히 소비 패턴 바꾼다고 가능한 건 아니다. 법을 바꾸거나, 책무성을 저해하는 방식을 바꾸거나, 정부가 자신들 결정 책임지도록 제도적 메커니즘 변화 필요하다. 다 해봤지만 안되더라 식의 비관이 아닌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낙관주의적 경향, 태도를 갖는 게 필요하다. 질문 감사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약간 피곤하지 않을까?
Q. 우리나라 기후 변화에 대한 인식 부족하다. 인식이 있어도 그간 편의를 포기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회의도 든다. 실천까지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A. 말만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환경 뿐 아니라 가사분담도 마찬가지다. 남편들이 말만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걸 들 수 있다. 저는 하지만 개인을 변화시키는 데는 긴 시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권력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씀 드린다. 법적 과학적 측면도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떤 위험에 대해 인식해야 하느냐를 결정하는 규범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이런 질문들이 결국 제도적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디지털뉴스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