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3일 토요일

<격치고> 13년, <동의수세보원> 1년

<격치고> 13년, <동의수세보원> 1년
동무 이제마의 사상의학에 대해서 그리고 그 저서인 <동의수세보원>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격치고(格致藁)>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연구자들도 잘 알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없다.

<동의수세보원>은 1893년에 집필을 시작해서 그 다음 해에 집필을 마쳤다. 일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격치고>는 44세때(1880년)에 집필을 시작해서 1893년에 마쳤다. 무려 13년 세월이 걸린 것이었고 그것이 끝나고 돌아서서 곧 바로 <동의수세보원>이 집필된 것이다.

여기서 이점을 분명히 해 두자. 시중에서 흔히들 4상의학을 말하지만 그것은 4가지 체질론, 체질유형론 정도의 것일 뿐이지 그것은 사상의학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4상의학을 타락시키고 격하시키고 훼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간명하게 말해서 동무의 학문으로 볼 때도 <격치고>를 바탕으로 사상의학이 성립한 것인 바에야 <격치고>에 대한 연구 없이 <동의수세보원>의 사상의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빈말이다. 그런 면에서 <격치고>에 대한 공부를 서둘러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공부의 수준을 업시키는데 있어서도 미래의학을 향한 새로운 단서를 찾는데서도 필수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격치고>는 인문학의 저술서이기 때문에 의학연구자로서는 상당한 인내와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제마의 사상의학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의학 자체가 인문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 없고 인문적 의학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한의학이 양의학과 질적으로 다른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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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면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차제에 <격치고>를 같이 공부할 수 있으면 한다. www.bangha.kr 에서 <격치고이야기>에서 진행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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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학을 알면 ‘인간’이 보인다 
한의학자 박대식, 이제마의 <격치고> 완역… 인간·자연·사회에 대한 유가적 성찰
(사진/"인간을 알아야 체질을 압니다." 박씨는 일상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체질구분을 시도하고 있는 <격치고>의 '독행'편에 주목한다)
동무 이제마(1837∼1900)가 창시한 ‘사상의학’(四象醫學)은 이제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낯선 용어가 아니다. 사람의 체질을 태양·소양·태음·소음인의 넷으로 나누어 체질에 따라 섭생과 치료를 달리하는 게 사상의학의 내용이라는 것 정도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최근 이제마의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인 <격치고>를 완역해 출간한 한의사 박대식씨는 그러나 “이제마가 제시했던 사상 체질 식별의 기준을 좀더 깊이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체질의학의 기본정신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채 너무 쉽게 체질에 대해 말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발언이다.
옮긴이가 ‘사상의학적 인간학’이란 부제를 붙인 <격치고>를 훑어보면, 이 책은 우선 의서라기보다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잠언집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임상경험이나 의술을 정리한 책이 아니라, 이제마가 유학 사상에 바탕해 세상과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놓은 일종의 철학서적이기 때문이다.

<동의수세보원>과 <격치고>는 동전의 양면

“사상의학을 전공하는 분들조차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은 중시하면서 <격치고>는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의대에서도 <격치고>를 강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그러나 <동의수세보원>과 <격치고>는 사상의학에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이제마의 본뜻을 놓치기 쉽습니다.”
<동의수세보원>은 이제마가 <상한론>과 <동의보감> 등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자신의 사상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의서다. 옮긴이는 <동의수세보원>에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네 체질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부분과 더불어, 일상의 인간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이미 네 체질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는 <격치고>의 ‘독행편’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격치고>는 ‘유략’ ‘반성잠’ ‘독행’ 등 세편으로 이뤄져 있다. 옮긴이가 이 가운데 우선 주목하고 있는 글은 ‘독행’편이다.
“사상의학에서는 체질 감별이 치료의 시작과 끝입니다. 체질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인간을 알아야 체질을 알고, 체질을 알아야 치료가 가능합니다. <동의수세보원>을 통해 사상 체질의 감별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이제마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독행’편을 보아야 합니다.”
독행편의 주제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이다. 이제마의 접근법은 매우 진지하다.
“대개 자신의 진실이 완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거짓을 남김없이 알기 어렵고, 자기에게 거짓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다른 사람의 진실을 또한 의심하게 된다.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진실하고 거짓되지 않아서 자신의 본성을 완성한 이후에야 다른 사람의 진실과 거짓에 대해 남김없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마는 이처럼 ‘남’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의료인 스스로가 먼저 성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신이 진실되지 않으면 남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지적은 의학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그의 의학사상이 유학사상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의학은 도가(道家) 계열의 사상을 배경으로 발달해왔습니다. ‘유의’(儒醫)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그건 유학자였다가 의술을 익힌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지, 유학사상을 배경으로 의학을 전개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마는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의학사상을 전개한 최초의 사람이자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격치고>는 이제마의 유학사상과 의학사상의 연결고리와 같은 저술이다. ‘격치’란 말 자체가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를 줄인 말이다. 전통적인 한의학은 자연과 인간을 음양오행설에 따라 이해하고 있는 데 반해, 이제마는 유가의 저작인 <태극도설> 등의 세계 이해를 받아들여 태극과 사상(四象)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이제마는 세계와 사람이 일(事)·마음(心)·몸(身)·사물(物)의 네 가지 상으로 이뤄져 있으며, 사람의 체질 또한 태양·소양·태음·소음의 네 가지 상을 보인다는 주장을 폈다.
<격치고>에서 제시하는 질병에 대한 이해도 독특하다.
“서양의학에서 환자의 몸이란 피부가 둘러싸고 있는 개체의 한계 안으로 한정됩니다. 그러나 한의학에서는 그런 한정을 넘어서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중시합니다. 이제마의 경우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매우 중시합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질병이 나온다
(사진/한의대 예과2년부터 15년 동안 <격치고>를 손에 놓지 않은 박씨. 의술을 알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서양의학의 경우 인간이 병에 걸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의 몸 외부에서 어떤 이질적인 세균이 몸 안으로 침투함으로써 질병이 생긴다. 한의학에서는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본다. 이제마의 독특함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 일상적 관계로부터 질병이 나올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독행’편의 사상인 체질 구분이 독특한 점은 이런 데 있다. 이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흥미롭다. 가령 태양인의 경우, 이제마에 따르면 늘 “권세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다. 태음인의 경우 늘 재화에 욕심이 있고, 소음인의 경우 늘 지위에 욕심이 있으며, 소양인의 경우 늘 명예에 욕심이 있다. 태양인의 경우 “예를 버리고 방종”하는 경향이 있고, 소양인의 경우 “지혜를 버리고 사사로움을 장식하는” 경향이 있으며, 태음인의 경우 “어짊을 버리고 극단적인 욕심을 부리는” 경향이 있고, 소음인의 경우 “의로움을 버리고 나태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보면 이제마가 인·의·예·지라는 유가의 네 가지 덕목을 중심으로 사상 체질의 성격을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대식씨는 이제마가 “관념적인 유학의 사상을 구체적인 의학 분야에까지 적용하여 유학의 학문적 범위를 확장시켰다”는 평을 내리고 있다.
그 결과 이제마의 의학사상은 또 한 가지 독특한 특징을 지니게 됐다. 그것은 개인의 건강과 사회의 건강을 바로 연결시키고 있는 강력한 사회성이다.
“가난은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지만 거짓을 좋아하는 것은 스스로 원한 것이다. 비천은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지만 게으름을 좋아하는 것은 스스로 원한 것이다. 곤궁은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지만 사치를 좋아하는 것은 스스로 원한 것이다. 궁핍은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지만 인색하기 좋아하는 것은 스스로 원한 것이다.”

15년에 걸친 <격치고> 연구 외길

이처럼 이제마는 가난, 거짓, 곤궁, 사치 등 얼핏 질병과는 무관한 일상의 삶조차 우리의 질병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그 치유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세상이 가난하면 힘으로 서로 도와서 구차하게 가난에 안주하지 않고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참으로 급하다. 남자의 뜻은 부유하면 다른 사람을 구제해야 하는데 이미 부유한데도 집을 부유하게 하는 것은 실로 바랄 것이 못된다.”
옮긴이는 한의대 예과 2년 시절 <격치고>를 처음 접한 뒤 지난 15년 동안 이 책을 늘 손에 들고 다녔다.
“번역본이 없지는 않았는데, 오역투성이어서 15년 동안 고쳐왔습니다. 그러다 4년 전 주위에서 출판을 권고해 본격적으로 출판을 위한 작업을 거쳤습니다. 번역에만 국한하지 않고 완전한 해설을 곁들여 출판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아직 많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저작임에도 옮긴이의 번역은 한문을 모르는 사람이 한글 번역문만 읽더라도 의미가 잘 통할 정도로 매끄럽다.
그는 최근에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마음의 생태학>을 번역하고 있다. 그의 서가에는 의학서적뿐 아니라 철학 등 인문학 서적이 풍부하다. “아마 이제마 선생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의술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믿습니다.”

<격치고>
이제마 지음, 박대식 옮김
청계(031-741-4745) 펴냄, 4만3천원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
한겨레21 2000년 07월 13일 제3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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