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 때리기, 인과관계 오인, 통계의 남용, 낡은 과학관
― 『회의적 환경주의자』에 내포된 네 가지 문제점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회의적 환경주의자』라는 책이 화제다. 덴마크 오르후스대학 정치학과의 통계학 전공 교수인 비외른 롬보르가 쓴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널리 퍼진 비관적 전망과 달리 지구환경이 결코 악화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방대한 통계자료를 통해 그는 지구환경과 인간의 생활조건이 오히려 더 나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인구증가에도 불구하고 1인당 평균적으로 돌아가는 식량의 양은 오히려 늘어났고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의 수도 줄었으며, 지난 50년 동안 삼림의 면적은 약간 증가했고, 에너지 자원을 포함한 각종 자원들은 고갈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선진국의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은 크게 개선되었고, 화학약품의 위협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향후 50년간 멸종될 종의 수는 불과 0.7%에 불과할 것이고, 지구온난화가 파국적인 결과를 빚어낼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교토협약은 실속없이 천문학적 비용만 잡아먹는 형편없는 정책이다. 이런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지구환경이 악화일로에 처해 있다는 암울한 예측이 여전히 지배적인 이유로 롬보르는 환경단체들이 자기 이해관계 때문에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과장하고 선정적인 언론이 이를 확대재생산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는 그동안 숱하게 반복되어 온 '뻔한 이야기'들을 넘어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기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부제가 말해 주듯 '세계의 실제 상태(real state of the world)' ― 월드워치연구소에서 매년 발간하는 『지구환경보고서』의 원제목인 'State of the World'를 명백히 겨냥한 제목 ― 를 측정해 봐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얘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숱한 통계자료에 의해 뒷받침되었다는 롬보르의 구체적인 주장들이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지를 가장 궁금해할 것이다. 이 문제에 한마디로 답하기는 쉽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의 주장 속에는 옳은(그러나 별로 새롭지는 않은) 얘기, 반쯤만 옳은 얘기, 불확실한데도 그럴 거라고 우기는 얘기, 명백히 틀린 얘기 등이 마구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불균질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점들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가 환경론자들을 비판함에 있어 종종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적을 상정해 '허수아비 때리기'에 몰두한다는 점이다. 인구증가와 식량부족 문제나 에너지 고갈 문제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1970년대 초·중반쯤에 영향력이 있었던 폴 에를리히와 같은 신(新)맬더스주의적 환경비관론자의 주장이 이후 틀린 것으로 드러났음을 되풀이해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논증은 두말할 것 없이 옳다. 그러나 오늘날 전지구적 식량 생산량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거나 석유가 당장 바닥나 경제가 절단날 거라는 등 30여년 전에나 통용되었을 믿음을 여전히 고수하는 환경론자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의 비판은 과녁을 벗어나고 있다. 오히려 대다수의 환경론자들은 식량의 부족이 아니라 분배 문제가 기아를 야기하는 핵심적인 원인이라고 보고 있고(이는 롬보르가 찬양해 마지않는 녹색혁명과 유전자조작식품을 환경론자들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한 이유가 된다), 석유나 석탄, 우라늄 같은 에너지의 '부족'이 아니라 에너지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환경 파괴를 문제삼고 있다. 그러다 보니 롬보르는 재생가능에너지의 의미도 엉뚱하게 파악을 하고 있다. 환경론자들이 재생가능에너지를 시급하게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기존의 화력, 수력, 원자력이 지구온난화, 댐 건설로 인한 지역생태계 훼손, 대형사고의 가능성과 핵폐기물의 위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구환경에 해를 끼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인데, 롬보르는 화석연료가 바닥을 드러내면 재생가능에너지는 기술발전과 시장논리에 의해 저절로 개발될 것이라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롬보르의 관심이 에너지의 고갈에만 맞추어져 있어 재생가능에너지를 개발가능한 또하나의 에너지원 정도로만 이해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롬보르의 서술은 종종 인과관계를 거꾸로 파악하거나 단순한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예들은 대기·수질오염, 오존층 파괴, DDT의 위험 외에도 롬보르가 제시하고 있는 사례 대부분이 포함된다. 롬보르의 주장대로 선진국에서는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이 분명히 감소했고 오존층 파괴로 인한 전지구적 위험도 경감되었으며 DDT와 같은 유해물질의 환경잔류 수준도 급격히 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환경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환경단체나 언론이 그간 환경문제를 과장해 왔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는가? 이건 본말이 전도된 이상한 논리다. 오히려 과학자들과 환경단체의 문제제기에 힘입어 이러한 오염 문제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고 그러한 인식이 일련의 논쟁을 거쳐 적절한 규제정책으로 전환됨으로써 현재와 같은 환경의 개선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대기 중에 방출되는 황의 농도를 일정수준 이하로 낮추도록 요구하고, 미온적인 각국 정부를 대상으로 오존층 파괴물질에 대한 전지구적 대응을 촉구하고, DDT를 비롯한 유해 살충제의 생산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야말로 환경단체들이 해온 역할이었다. 롬보르는 이렇게 '뻔한' 역사적 사실도 제대로 알지 못했을까?
롬보르가 환경단체의 역할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이유는 개발도상국의 환경오염에 대한 그의 진술로부터 유추해볼 수 있다. 그는 선진국과 달리 개발도상국에서는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그 이유를 개발도상국의 빈곤에서 찾고 있다. 쉽게말해, '배가 고플' 때는 그런 '사치스런' 문제에 신경쓸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개발도상국에서는 경제성장이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한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따져볼 여지가 많다. 이미 과거에 경제성장을 이룬 선진국들에서 환경문제가 낮게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가 곧 '경제성장→환경문제 해결'이라는 도식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좋은 환경정책은 돈만 많으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 도입된 서구식 경제성장 과정은 그 자체로 가속적인 환경파괴를 수반하며 지역간·계층간 불평등을 키운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강하게 나오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경제성장이 과연 환경문제 해결의 필수 전제조건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셋째로 『회의적 환경주의자』의 통계 이용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롬보르는 총합적 수준의 통계, 특히 지구 전체나 개발도상국 전체를 평균내는 식의 통계치를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포괄적 통계는 매우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평균치는 그 속에 매우 중요한 세부사항들을 감춰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로 전세계의 삼림 면적이 지난 50년 동안 줄어든 것이 아니라 전체 육지 면적의 30.04%에서 30.89%로 오히려 약간 증가했다는, 언론에 널리 보도된 주장을 한번 따져보자. 여기서 인용된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통계자료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많지만 일단 이 문제는 접어두겠다. 그러나 설사 전세계 삼림 면적이 약간 증가했다는 얘기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는 삼림의 위치나 수종, 연령, 질 등에 대해 거의 말해주는 바가 없다. 예컨대 같은 기간 동안 북반구의 선진국에서는 삼림의 면적이 늘어난 반면 적도 부근의 열대림은 상당부분(대략 20% 가량) 줄어들었고, 특히 아프리카나 중앙아메리카의 일부 국가들은 삼림의 면적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이는 열대림이 생물다양성과 자원의 보고라는 점에서 상당한 문제이다. 또한 많은 삼림들이 일단 벌채된 후 단일 수종의 조림지로 대체되고 있는데, 조림지는 애초의 삼림에 비해 생물다양성이나 가치의 측면에서 상당히 떨어진다(롬보르는 이런 사실들을 언급은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본다면 전세계적으로 '가치있는' 삼림의 면적이 상당히 줄어들었으며(환경단체의 열성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빚어졌음에 유의하라), 일부 지역이나 국가의 경우에는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삼림의 상태에 대한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단순히 전지구적 삼림 면적이 대략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위안거리로 삼을 일은 아니다.
지금까지 지적한 세 가지 문제점은 롬보르 논지의 신뢰성을 상당한 정도로 잠식하며 때로 저자의 의도를 의심하게까지 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회의적 환경주의자』의 근저에는 사실 이보다 훨씬 거대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는 롬보르가 「내일의 문제들」이라고 이름붙인 5부와 연관이 크다. 그는 여기서 환경호르몬, 생물의 멸종, 지구온난화 문제가 과학자들이나 환경단체의 주장과는 달리 심각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의 심각성을 입증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 환경호르몬이 남성의 정자 수 감소의 원인인지는 분명치 않으며(남성들의 과도한 성행위가 그 원인일 수도 있다), 대규모의 멸종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줄 만한 직접 증거가 없고(멸종 추정치와는 달리 멸종이 '확인된' 종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지구온난화가 파국적인 결과를 빚어낼지 모른다는 증거도 불충분하다(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에서 제시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며 지구온난화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메커니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롬보르의 태도는 일견 '과학적'인 것처럼 보인다.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기 전까지 어떤 쟁점에 관한 판단을 조심스럽게 유보하는 것은 과학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훌륭한 덕목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불행히도 여기서 롬보르는 과학의 성격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 오늘날 이미 다른 국면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실험실에서 충분한 반복 실험을 해본 후 확신이 섰을 때 이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던 과거의 아카데믹한 과학과 달리, 세계 전체를 거대한 실험실로 탈바꿈시킨 현대의 (규제)과학은 그러한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다. 오늘날의 '탈정상과학(post-normal science)' 국면에서는 그 속에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혀 있는 불확실성 때문에 수많은 쟁점들에 대해 빠르고 확실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젠가 충분한 증거가 쌓일 것으로 믿고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는 것이, 그런 식의 유보적 태도는 자칫 너무나 큰 위험부담 ― 공공보건의 위기나 파국적 환경재난과 같은 ― 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과학자가 '충분한' 증거를 찾아 판단을 유보하고 위험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매우 위험부담이 큰 결정을 조속히 내려야 함을 사회 전체에 알리고 모두가 참여하는 가운데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욱 '책임있는' 태도이다(그리고 바로 이것이 롬보르의 주장에 대한 환경과학자들의 반박에서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변화한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과학이 확실성과 보증을 제공해 줄 것으로 믿는 낡은 패러다임에 집착하는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안전하고 단순한 세계를 향한 향수의 한 흔적"일 뿐이다.
출전: 『창비웹진』 28호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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